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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섬, 앨커트래즈: 공포의 감옥에서 역사적인 관광지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만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섬, 앨커트래즈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연방 교도소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차가운 바닷물과 거친 해류, 그리고 철저한 감시망으로 둘러싸여 '탈출 불가능한 감옥'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이곳은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앨커트래즈 섬의 깊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탐구하며, 그 이름이 가진 의미와 함께 어떻게 공포의 상징에서 오늘날의 인기 있는 관광 명소로 변모했는지 상세히 들여다봅니다.
단순한 감옥을 넘어선 이 섬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여, 방문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하는 그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펠리컨의 섬, 앨커트래즈의 기원
앨커트래즈 섬의 역사는 1775년 스페인 탐험가 후안 마누엘 데 아얄라가 샌프란시스코 만을 탐사하며 이 섬을 '라 이슬라 데 로스 알카트라세스'(La Isla de los Alcatraces), 즉 '펠리컨의 섬'이라 명명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섬에는 수많은 바닷새, 특히 갈색 펠리컨이 서식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후 멕시코-미국 전쟁을 거쳐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영토가 되면서, 이 섬은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세기 중반에는 미국 서해안 최초의 등대가 건설되고 강력한 군사 요새로 개발되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만을 지키는 요충지이자 군법을 어긴 군인들을 수용하는 군사 감옥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며, 훗날 악명 높은 교도소로의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험준한 지형과 고립된 위치는 자연적인 방어막을 제공하여 초기부터 죄수들을 가두는 데 최적의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연방 교도소 '더 록'의 탄생
1930년대, 미국의 금주법 시대가 끝나면서 조직 범죄가 극에 달하자, 연방 정부는 가장 위험하고 교화 불가능한 범죄자들을 수용할 최고 보안 교도소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리하여 1934년, 앨커트래즈는 미국 법무부로 이관되어 연방 교도소로 공식 지정됩니다.
이때부터 '더 록(The Rock)'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사회의 법을 어기면 감옥에 가고, 감옥의 법을 어기면 앨커트래즈로 간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강력한 상징성을 띠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만의 차가운 수온, 강한 조류, 그리고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는 외부로부터의 침입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탈출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336개의 독방과 42개의 독방 감방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감자 3명당 1명꼴로 배치된 교도관들이 24시간 철저하게 순찰하며 감시했습니다.
이곳에 수감되는 것은 사실상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했고, 그 잔혹하고 고립된 환경은 수많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앨커트래즈의 유명 수감자들
앨커트래즈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수용하여 그 명성을 더욱 드높였습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시카고 마피아의 대부 '스카페이스' 알 카포네입니다.
그는 조지아주 교도소에서도 시카고 범죄 조직을 계속 운영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앨커트래즈로 이감되어 4년간 복역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는 밴조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금주법 시대의 대표적인 갱스터이자 납치범인 조지 '머신 건' 켈리도 이곳에서 17년을 보냈습니다.
이 외에도 '크리피 카르피스' 앨빈 카르포비츠 등 수많은 중범죄자들이 이곳에 갇혀 절망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앨커트래즈를 단순한 감옥이 아닌 범죄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각인시켰고, 수감자들의 비인간적인 대우, 자살, 간수 살해 등의 끔찍한 기록들로 '악마의 섬'이라는 오명을 더욱 짙게 했습니다.
불가능에 도전한 탈옥 시도와 미스터리
앨커트래즈가 '탈출 불가능'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29년의 운영 기간 동안 총 14번에 걸쳐 36명의 수감자들이 탈옥을 시도했습니다.
대부분은 사살되거나 다시 붙잡히고, 일부는 차가운 바닷물에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962년 6월 11일, 프랭크 모리스와 존, 클라렌스 앵글린 형제의 탈옥 사건은 아직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세계 탈옥사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들은 숟가락과 진공청소기 부품으로 만든 드릴로 감방의 콘크리트 벽을 뚫고, 석고와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으로 침대에 자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이후 비옷으로 만든 뗏목을 이용해 밤바다로 사라졌고,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FBI는 익사로 결론 내렸지만, 이들이 어딘가에서 살아남아 숨어 살고 있다는 음모론은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사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유지 비용과 노후화로 인한 폐쇄
악명 높은 앨커트래즈 교도소는 1963년 3월 21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쇄되었습니다.
폐쇄의 주된 이유는 엄청난 운영 비용과 시설의 노후화였습니다.
앨커트래즈는 작은 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식량, 물품, 그리고 심지어 교도소의 발전기를 돌릴 연료까지 육지에서 운송해야 했습니다.
특히 발전기 연료를 오리건 주에서 운반하는 등 먼 거리에서의 수송은 막대한 물류 비용을 발생시켰습니다.
1인당 일일 운영 비용은 다른 연방 교도소의 약 3배에 달했으며, 최대 수용 인원이 336명에 불과해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또한 해풍과 염분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시설은 심각하게 부식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며, 안전하게 유지보수하기 위해서는 수백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낡은 시설을 재건하는 것보다 새로운 교도소를 짓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결국 앨커트래즈의 문을 닫게 됩니다.
원주민 점거와 새로운 의미의 부여
교도소 폐쇄 후 약 6년간 방치되어 잊혀가는 듯했던 앨커트래즈 섬은 1969년 11월 20일, '모든 부족의 인디언 연합(Indians of All Tribes)'이라는 단체에 소속된 약 89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활동가들에 의해 점거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모호크족의 리처드 오크스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1868년의 포트 래러미 조약을 근거로, '쓰레기 같은' 섬을 인디언 자치구로 요구하며 문화, 교육, 생태 센터로 만들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하기 수천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앨커트래즈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며 섬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점거는 19개월 동안 이어졌고, 한때 5개 부족 600여 명이 넘는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내 원주민 권리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앨커트래즈 섬에 단순히 죄수를 가두던 장소 이상의, 저항과 희망의 상징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연방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되기까지의 이 모든 활동은 비디오로 기록되어 역사에 남겨졌습니다.
국립공원으로서의 앨커트래즈: 현재와 미래
1972년, 미국 의회는 앨커트래즈 섬을 골든 게이트 국립휴양지(Golden Gate National Recreation Area)의 일부로 지정하고 국립공원관리청(NPS)의 관리 하에 두었습니다.
이로써 앨커트래즈는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모두에게 열린 역사 유적지이자 관광 명소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샌프란시스코 피어 33에서 페리를 타고 섬을 찾아오며, 금문교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방문객들은 오디오 가이드 투어를 통해 감방, 식당, 운동장, 독방 감금 구역 등 교도소의 잔혹한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섬에는 미국 서해안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 초기 군사 요새의 흔적, 그리고 번성하는 바닷새 서식지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복원된 아름다운 정원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앨커트래즈를 다시 연방 교도소로 재개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천문학적인 복구 및 유지보수 비용과 국립공원으로서의 가치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낮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앨커트래즈는 그 어두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역사가 공존하는 특별한 장소로 전 세계인의 발길을 이끌고 있습니다.
마무리
앨커트래즈 섬은 '탈출 불가능한 감옥'이라는 냉혹한 이미지와 함께, 스페인 탐험가들의 발길이 닿았던 태고의 자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 그리고 원주민들의 저항 정신이 깃든 역동적인 변화를 모두 담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에는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채 평화로운 국립공원으로 변모하여, 방문객들에게 그 어떤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교훈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만의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합니다.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자유와 속박,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앨커트래즈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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