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어때

잉글랜드 남서부의 아름다운 도시 바스(Bath)는 그 이름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목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영국에서 유일하게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온천수를 자랑하며, 수천 년 전부터 그 치유력과 따뜻함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습니다.
특히 로마인들이 브리타니아를 점령하기 훨씬 이전부터 켈트족은 이 온천을 신성시하며 여신 술리스(Sulis)에게 헌정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지하 3,000미터 깊이에서 솟아나는 약 46℃의 온천수는 매일 117만 리터에 달하는 양이 솟아나며, 이는 목욕탕의 운영에 필수적인 원천이었습니다.
이 물은 지표면으로 올라오면서 칼슘, 황산염, 염화물 등 다양한 미네랄을 함유하게 되는데, 로마인들은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거대한 목욕 단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스의 온천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신의 선물이었으며, 로마 제국에게는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 이점은 바스가 로마 제국의 중요한 행정 및 종교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후 1세기 중반,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를 점령하고 당시 아쿠아 술리스(Aquae Sulis)라 불리던 바스 지역의 온천 자원에 주목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켈트족의 여신 술리스를 자신들의 여신 미네르바(Minerva)와 동일시하여 '술리스 미네르바(Sulis Minerva)'라는 복합 신을 창조하고, 온천 위에 거대한 신전과 함께 공중목욕탕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욕탕의 건설은 단순한 건축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로마 문명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피정복민에게 로마식 생활 방식을 전파하려는 의도가 담긴 정치적, 문화적 사업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주둔군 병사들을 위한 시설이었지만, 점차 로마인 정착민들과 현지 귀족들이 이용하는 사교와 휴식의 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약 300년에 걸쳐 확장되고 개조되면서 바스 로마 목욕탕은 칼다리움(온탕), 테피다리움(미온탕), 프리기다리움(냉탕)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방들과 운동장, 도서관, 상점 등을 포함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했습니다.
로마 공병대의 뛰어난 기술력과 조직적인 노동력이 결합되어 건설된 이 목욕탕은 로마 제국의 기술적 역량과 건축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스 로마 목욕탕은 고대 로마 엔지니어링의 정수를 보여주는 놀라운 건축물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기술은 바로 '하이포코스트(Hypocaust)' 시스템입니다.
이는 바닥 아래 공간을 만들어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켜 바닥과 벽을 데우는 난방 방식으로, 현대의 온돌과 유사한 원리였습니다.
목욕탕의 구조는 온천수가 들어오는 '성스러운 샘(Sacred Spring)'을 중심으로 대형 수영장 역할을 했던 '그레이트 배스(Great Bath)', 온탕인 칼다리움(Caldarium), 미온탕인 테피다리움(Tepidarium), 냉탕인 프리기다리움(Frigidarium)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그레이트 배스는 약 1.6미터 깊이의 거대한 직사각형 풀로, 납으로 된 바닥과 온천수가 끊임없이 공급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이 납 파이프 시스템은 목욕탕 전체로 온천수를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사용된 물을 배수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정교하고 앞선 기술이었습니다.
또한, 지붕은 돔 형태로 설계되어 열 손실을 최소화하고 습기 조절에 용이하게 했으며, 채광을 위한 천창도 설치되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기술들은 로마인들이 단순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넘어, 최적의 환경에서 목욕을 즐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 시대에 목욕은 단순한 개인위생의 행위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적 의례였습니다.
바스 로마 목욕탕은 모든 계층의 로마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하루 종일 사람들이 북적이는 활기찬 공간이었습니다.
아침에는 주로 여성들이 목욕탕을 이용했으며, 오후에는 남성들이 모여 목욕을 즐겼습니다.
목욕탕에서는 단순히 몸을 씻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업 거래를 하고, 최신 소식을 교환하며, 심지어 운동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목욕 순서는 일반적으로 팔레스트라(운동장)에서 가벼운 운동을 한 후, 테피다리움(미온탕)에서 몸을 예열하고, 칼다리움(온탕)에서 땀을 내어 피부 노폐물을 제거한 뒤, 냉탕인 프리기다리움(Frigidarium)에서 몸을 식히며 마무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때 '스크리지'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몸의 땀과 기름때를 긁어냈습니다.
로마 목욕탕은 또한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도 했습니다.
도서관과 강연실이 갖춰져 있었고, 예술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어 방문객들에게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했습니다.
이처럼 바스 로마 목욕탕은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브리타니아에서 로마 문화를 체험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장소였습니다.

바스 로마 목욕탕은 세속적인 기능을 넘어 깊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온천수를 신성한 힘의 원천으로 여겼으며, 이 온천이 켈트족의 여신 술리스와 로마의 지혜와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의 합쳐진 신격인 술리스 미네르바 여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목욕탕 단지 내에는 술리스 미네르바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는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소 중 하나였습니다.
신전 내부에는 여신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순례자들은 온천수에 치유의 효능을 기대하며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신전 주변에서는 동전, 보석, 저주 명판 등 다양한 봉헌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저주 명판은 로마인들이 신성한 온천수에 개인적인 불만이나 저주를 빌어 그 응답을 기대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증거입니다.
이 명판들은 주로 도난당한 물품의 회복이나 불의에 대한 보복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삶의 단면과 종교적 믿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바스 로마 목욕탕은 로마인들의 실용적인 생활 공간이자 동시에 영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로마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브리타니아에서 로마 군대가 철수하면서 바스 로마 목욕탕도 점차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목욕탕은 수백 년에 걸쳐 진흙과 퇴적물로 덮여 버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잊혀진 지하 유적이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이 지역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고, 목욕탕의 존재는 전설 속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바스 지역에서 우연히 고대 로마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잊혀졌던 로마 목욕탕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특히 1878년 건축가 존 우드(John Wood) 부자가 우물 공사를 하던 중 대규모 로마 유적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을 통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그레이트 배스와 하이포코스트 시스템,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이는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재발견된 로마 목욕탕은 잊혀졌던 로마의 영광을 다시 조명하고, 고대 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바스 로마 목욕탕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이자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발굴 이후, 유적의 보존과 대중에게의 공개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현대 기술을 활용한 정밀한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방문객들이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박물관 시설이 확충되었습니다.
특히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유적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일부 공간에서는 로마 복장을 한 배우들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여 몰입감을 더합니다.
바스 로마 목욕탕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보편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물의 보존을 넘어, 인류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매년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로마 제국의 위대한 유산을 직접 보고 느끼며, 고대 문명의 지혜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바스 로마 목욕탕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인류 문명의 끊임없는 발전과 계승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